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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될 편지



  격조했습니다. 오늘의 서천꽃밭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어머니. 당신께 또 보내지 못할 편지를 씁니다. 어차피 보내지 못할 터이니 두서없이, 이번에도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어머니. 당신은 저를 몇 번 외면하셨습니다.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인의예지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누구나 저를 가장 먼저라 여기기 때문이라 성인께서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저는 예를 받들어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여튼, 저는 아마도 그 때의 당신 또한 살고자 발버둥 쳤던 저만큼 필사적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당신은 저를 사랑했지만, 당신은 저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당신은 매양 겨울 같은 여인이었으니까요. 당신은 어쩔 수 없이라도 그렇게만 계셨어야 함을 아옵니다. 이 유 씨 집안은 당신이 봄처럼 마냥 곱기에도, 여름처럼 열을 내기도, 가을처럼 매일 우수에 차 있기에도 적합하지 않았으니 말이지요.

  재차 말씀드리지만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때의 저도 당신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말하자면 으슥한 밤에 홀로 울 적 같을 때, 당신은 작고 서글픈 사과의 말과 함께 낙엽처럼 우셨기 때문에 제가 당신을 원망할 일은 결코 없었나이다. 그럼에도 약간이나마 샘솟는 서러움은 어쩔 도리가 없더군요.

  허나 다시 단언컨대 설움이 미움으로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음이 그토록 검게 변하기엔 저는 집안의 어둠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터무니없이 두려워 하였기에 필사적으로 도망쳤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러기엔 당신은 너무도 처연하게 아름다웠습니다. 비 온 뒤의 목련처럼요. 다 짓밟힌 꽃잎이 슬펐습니다. 당신이 다 짓밟히면서도 그토록 오롯이 있음은 필사적인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아온데, 어찌 당신을 미워할까요. 그러므로 저는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어미된 자를 당연히 사랑하고 싶었으므로 그러는 수밖에요.

  그러나 외로울 때가 있었어요. 저는 외로울 때가 있었어요. 어두운 광에서 달도 없는 밤을 지새야 했을 때, 시퍼렇게 멍든 팔을 말하지 못하고 붉은 숨만 토해내야 했을 때, 당신이 쪽창 너머에서 저를 보고도, 당신이 눈밭의 매화나무처럼 서 계셔야 했기에 애써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을 때 숨쉬지 못할 정도로 외로웠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해묵은 외로움을 너무 많이 안게 되었나이다. 제 속에는 썩어 문드러져 남은, 절대로 분리해낼 수 없는 고독이 있습니다. 그 우울한 벌레가 구슬픈 울음을 흘리며 마디로 나뉜 몸뚱이를 꿈틀대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가끔 이렇게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썼다가 태워 삼킬 밖에. 그러면 저는 또 고독이나 고독이 내는 울음소리를 잊은 척 하고 웃는 탈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잊힐래야 잊히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아는 그 모든 죄라던가 하는 것들이요.

  그런데 제가 가진 괴로움들을 어찌할 수 없다면, 잊으라 말해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잊을 수 없을 거라 여겼지만, 그는 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에 해준 조언이었습니다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고독 또한 분리할 수는 없더라도 덮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잊는 것과 다를 바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너무 많은 것을 잊어야 하는 몸이군요.

  이제 그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당신은 이런 안부 없이도 저승에서 잘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비록 잊을 것이지만 죄가 있음에는 명백하니, 사후에 좋은 곳에서 다시 만나지는 못하겠지만 당신은 제 속에서 늘 숨쉬고 계실 터. 허니 오랜 시간 뒤에 또 오래 보내지 못할 글로 그나마 뵙겠나이다. 그 때까지 늘 평안하시길.


두 번째 매미가 운 여름날,
아들 유 선요 올림.


옛날 이야기를 담은 편지 / 15. 0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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