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 어둑서니가 서리었다. 선요는 잠시 일렁인듯도 했던 골목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바람길이나 다름없어 찬 바람만 쌩쌩한 골목을 위태로운 호롱 하나에 의지해 가다 모퉁이를 두어 번 더 돌면 목적지에 다다른다. 천명의 집. 예고 없는 방문이라 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다행히 집 앞에 다다르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마당에 들어서서 문을 두드리면 약간의 인기척이 들리고 곧 문이 열렸다. 능청스러운 얼굴로 천명이 뜻 없던 손님을 맞았다.
"오?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뜬금없이 야식 배달 왔습니다. 얘기도 할 겸."
선요는 바랑을 보여주며 슬쩍 웃었다. 천명은 감탄사를 흘리며 선요를 안으로 들였다. 대박, 야식이래. 뭡니까? 주먹밥. 아, 뭐야. 고작 주먹밥이라는 것에 좀 실망한 듯도 했지만 천명은 더 말하지 않고 편히 앉으라며 손짓했다. 이 집에 올 때마다 늘 앉던 자리에 버릇처럼 앉은 선요는 바랑에서 조금 식어버린 주먹밥 세 덩이를 꺼내어 내밀었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는 샐쭉 웃으며 밥을 덥썩 집어 입에 넣었다. 먹는 모습을 보던 선요는 그가 이번에 씹는 것을 대강 마친 끝에야 이야기를 하자고 생각했다.
선요가 가지고 온 얘기라고 함은, 역시 형의 이야기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형제와 어쩔 수 없이 반목하며 살아온 자가 내린 결정에 대한 이야기. 죽느냐, 사느냐. 그 두 가지 선택의 길에서 사는 것을 택하기로 한 자의 이야기. 공교롭게도 자신이 살고자 한다면 형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 불행히도 형제는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용서해주기를 바란 적도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어차피 그 형제 관계에 얽힌 애증, 정의, 단죄 혹은 사죄 그 모든 것들을 떠나서도 결과는 같을 것이었다. 말하자면, 유선오와 화선요는 그런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평화를 찾을 수 없는 자들. 처음부터 공존할 수 없는 가여운 존재들.
그랬기에 형은 늘 자신의 목을 향해 이빨을 들이대었더랬다. 그리고 그 벼린 무기 앞에서 어렸던 자신은 늘 도망만 쳤었다. 지금은 아니다. 영원히 죄인일지라도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고, 또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눈앞의 사내가 자신의 일을 도와주기로 한 약속 덕택에 더더욱.
연장선상에서 말하자면 천명은 참 속내를 모를 사람, 아니 마족이었다. 사실 저로서도 도와달라 부탁을 하면서도 그러마 호의를 베풀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제멋대로고 지나치게 솔직해 보이면서도 실상은 그 속내를 아무도 알 수 없는 이였다. 친구라 자처하고 있는 선요조차도 천명의 진심을 몰랐다. 선요는 천명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당신은 절망할 거라던 그 정곡. 그게 자신이 추측컨대 천명의 진심에 가장 가까운 말이리라. 하지만 그걸 자신이 섣부르게 판단해서 무엇하겠는가. 애초에 종족의 차이가 있었고,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고 교류하는 게 아닌, 일방적인 흥미와 일방적인 호의로 만들어진 관계의 형태이므로 어떻게 하더라도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은 것을 말이다. 그러나 속내는 둘째치더라도 외적정보만이라면 선요는, 천명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이를 테면, 천명에겐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희한한 능력이 있다거나.
"그래서 말인데 얘기 말이에요."
천명은 선요가 갖고 온 주먹밥을 씹다 말고 선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등불로 인해 생긴 잿빛 그늘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인상이 더 험해보인듯도 했다. 선요는 턱을 괸 채 잠시 흘끗 보았을 뿐, 더는 천명을 바라보지 않고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문제가 생겼는데,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어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멈췄다. 천명이 밥을 씹던 걸 멈춘 것이다.
"그래서 못 간다는 거야? 우리 대사막 안 갑니까?"
"아, 화내지 말고."
"화 안 냈거든. 그래서 어쩔 겁니까?"
"오빠, 그 희한한 능력 있잖아. 그걸로 나 옮겨주고, 오빠도 오고."
"근데,"
선요는 그제야 고개를 치켜들어 천명을 제대로 보았다. 천명은 자신보다 키가 한참이나 커서, 그를 바라볼 때마다 선요는 늘 해바라기가 된 것 같았다. 앉아서 바라볼 때도 목이 살짝 뻐근한 것 같았다. 절로 눈썹을 조금 찡그리고 있자니 천명 또한 짐짓 심각해진 얼굴로 주먹밥을 다시 입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부정확한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상아 잉는 거 보내능 겅 좀 힘등데."
"다 먹구 말해요."
"-좀 힘들다고. 그리고 가면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
시간은 있을 거야, 아마도. 선요는 작게, 하지만 천명에겐 확실히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천명은 손을 파닥거렸다. 일단 뭐 마실 걸 달라는 듯한 손짓이었다. 선요는 옆에 있던 병을 들어 잔에 따라 내밀었다. 색깔이 연한 녹색인 것을 보아 녹차를 담아놓은 듯했다. 아, 다 식었네. 천명은 잔을 입에 대자마자 잠시 투덜거렸지만 결국 잔은 깨끗이 비었다. 선요가 제 몫의 잔을 채우고 있을 때쯤 머리 위에서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합니까? 시간 있을 거라는 거."
"지금 성도 상황이 육로를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래. 말하자면 형은 채운항에 갇힌 거야. 나도 접근을 못 하게 된 셈이지만, 나는 오빠가 단번에 이동시켜 줄 수 있고, 형은 아니지."
기억으론, 건원성도 정문을 지나면 숲이 나온다. 버려진 숲. 최근 숲은 기억보다 훨씬 더 위험해졌다고 했다. 자신이 아는 형이라면, 숲을 통과할 배짱은 된다. 그러니 대사막 쪽으로 갈 생각을 했었겠지. 그러나 문제라면, 하필 이 때 정문을 지날 수 없게 됐다는 것. 그렇다면 여건 상으로 봐도 채운항으로 돌아가, 거기에 머물 수밖에 없다. 다른 곳은 몰라도 채운항의 분위기는 상당히 느슨한 편이기 때문에 누구든 숨어 있기 제법 좋은 곳이다. 해적들도 채운항에서는 큰일을 벌이지 않는 이상 별 제재를 받지 않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대강 그것을 설명한 뒤에 선요는 입을 축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남은 건 해로 뿐인데. 해로를 이용하려면 밀항이나 출항하는 배를 기다려야 할 거지만 배 타기도 정말 쉽지 않을 거야. 형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이것저것 품위나 체면을 지키는 사람이거든. 지금은 다시 숲을 지나고 있다고 하니 채운항으로 이동하고, 오빠는 회복하고, 형을 추적하면 돼."
"그거 누구한테 들은겁니까?"
"응, 내가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놨거든요. 우리 나리와 일하는 사람인데 나랑도 어떻게 연이 닿았어요. 아직도 나리랑 같이 일하는 분이라 믿을만 하기도 하고."
선요는 잠깐 익숙한 이름을 되뇌었다. 서 하준. 그가 해준 목란의 이야기가 닻처럼 이어서 올라온다. 목란. 새끼 늑대에게 붙여준 이름이기도 한 그것은 어미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운국의 기녀이기도 했지만, 개방출신이기도 했다. 그러나 출신의 굴레는 독이었다. 그 출신 때문에 그녀와 자신은 얼마나 많은 겨울삶을 지샜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굴레는 이제와 우습게도 새옹지마를 증명한다. 어미를 사랑했던 남자와, 그 남자와 함께 일하는 여자. 처녀 시절의 어미를 알았던 그 여자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이야기를 선요는 아직도 기억한다. 네가 목란의 아들이라고? 그 말을 되새기던 선요는 입가의 점을 제 검지로 쓸다 내렸다. 너무 깊어진 생각을 깨우듯 천명의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그럼 운국에 가면 그 인간과 접선하고,"
"우리는 그 분이 주신 정보를 토대로 형을 쫓게 되겠죠."
"그리고 추적해서, 죽인다. 맞지?"
간단하게 요약하면, 그렇네요. 선요는 조금 서글프게 웃었다. 천명은 그 얼굴을 물끄럼 보다가 즐거워 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하고 능청스레 말했다. 하지만 선요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천명은 다른 말을 흥얼거렸다. 일단 난 뭐든 할 생각이니까. 선요는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지나가는 투로 살벌한 말을 했다. 최소 다섯은 죽이게 해줄 수 있어. 아, 너무 적잖아. 장미에 가시가 있다는 말이 딱 맞았다. 몇 번인가의 그런 표독한 말을 천명과 함께 입에 올리던 선요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지금이 몇 시지, 아직 해시니까. 새벽에 가자. 새벽에 가면 아침일 거고. 좀 쉬고. 추적하고. 괜찮을 거야. 오빠도 괜찮죠?"
"아, 정말. 당신은 목전에 닥쳐서 말하는 거 진짜 잘 해."
"미안, 미안해요."
그러나 천명은 자신이 했던 말이 빈 말이었다는 듯 손사래를 친 뒤 기지개를 폈다. 긴 팔이 천장으로 쭉 뻗히는 걸 보던 선요가 몸을 바르게 한 뒤 돌아갈 채비를 했다. 천명은 배웅 안 해줄 셈인듯 아예 뒤로 돌린 팔에 상체를 기댔다.
"그럼, 내일 새벽에."
"어디서 봐요?"
"여기로 다시 올게요."
"좋아."
내일 새벽에.
천명은 선요가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선요는 고개를 한 번 까닥이곤 문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다시 찬 바람이 볼을 때렸다. 어둑서니 또한 변함없이 길 군데군데 서리어 있었다.
→
천명과 함께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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