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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끝 中





  밤은 동이 트기 전 새벽에 가장 깊다. 별조차 보이지도 않는 토끼의 시간. 호롱 하나만이 집안을 어룽어룽 밝히고 있었다. 천명은 힘없이 흔들리는 불꽃을 보고 있다가 가만히 불꽃 끝을 보고 앉은 선요를 돌아보았다. 선요의 시선은 멍한 것처럼 보였다. 시선이 불꽃을 정확히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불꽃을 보는 척 그 너머의 다른 것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천명은 딱히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지금부터 일어날 일과, 자신이 얼마만큼 재미를 볼 수 있는지, 그리고 선요가 앞으로 얼마만큼 절망할 것인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모두 다 성공을 가정한 생각들이었다. 


  "준비 됐습니까?"


  천명의 부름에 불꽃에 시선을 빼앗겼던 선요가 고개를 들었다. 미동 없던 고개가 딱 한 번 움직였다. 긍정의 의미였다. 천명은 샐쭉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일어나서 어깨 짚어요. 선요가 눈을 끔뻑였다. 아, 거기 땅바닥에 앉아 있을 순 없잖아. 그럴싸한 말이라 생각했는지 선요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천명은 선요가 일어나는 걸 보고 상체를 한 쪽으로 기울여 초에 바람을 훅 불었다. 순식간에 암흑이 찾아왔다. 선요가 짧게 끄응, 하고 소리를 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 시야가 싫은 모양이었다. 


  "안 보여..."

  "어깨에 얹으라니까. 안 얹으면 혼자 간다?"

  "지금 어두워서 어깨가 어딘지 안 보이니까 좀만 기다려봐요."


  선요는 느리게 눈을 몇 번 더 깜빡였다. 곧 시야가 점차적으로 밝아지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새는 희뿌연 달빛이 탁자나 방석 같은 것들의 모양새를 겨우 알아챌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손을 잼잼거리던 선요가 곧 천명의 흰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천명의 어깨는 팔을 다 뻗어야 겨우 닿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었다. 이 키가 풍월관 앞에 있는 사자석상만하던가. 선요는 잠깐 시시콜콜한 생각을 했다. 중대사를 앞에 두고 하는 생각치고는 정말 얼빠지는 것이긴 했지만, 어쩐지 긴장이 풀리는 듯도 해서 웃음을 피식 흘렸다. 오빠 키 진짜 커. 그런 작은 투덜거림을, 천명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갑시다. 눈 감아요."


  눈을 감는 순간, 순간적으로 속이 울렁였다. 뭔가가 내장을 덥썩 잡고 쥐흔들어 버리는 것 같은 기분. 익숙한 토기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어떻게 느끼자면 사냥 당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애초에 '끌려간다'는 기운이 강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지잉, 하는 이명이 있었다. 선요는 헛구역질을 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축지와는 완벽하게 다른 개념의 이동방식이었다.


  그렇게 육체와 정신이 혼란스러웠던 중에 발은 어느새 땅에 닿아있는 듯도 했다. 선요는 언제 눈을 떠도 되느냐고 천명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도 울렁거림이 가라앉지 않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찰나, 옆에서 털썩 하고 커다란 게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선요는 눈을 번쩍 떴다. 천명이 바닥과 붙어 있었다.


  "아, 헉, 진짜, 헉-"


  천명의 숨은 고르지 못한 상태였다.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고, 천명은 주변의 공기를 전부 다 삼켜버릴 듯한 기세로 호흡했다. 오래 알고 지냈지만 천명의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흑룡교를 사냥하고 왔다던 날, 얼굴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그어...' 하고 장난을 치던 남자였는데 말이다. 선요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아무 말도 뱉을 수 없었던 자신의 상태를 잊은 채 상체를 숙여 그의 하얀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오빠?"

  "지금, 이게, 괜, 찮아, 흐으, 보입, 니까?"

  "아뇨..."


  부정의 대답을 흘리며 선요는 다시 몸을 세웠다. 천명은 아직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조금만 더 날이 따뜻했다면 아주 그냥 드러누웠을 기세다. 선요는 그런 천명을 힐끔 내려다보다 손을 내밀었지만 천명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쩔 수 없이 선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이명이 멈춘 귓가에, 파도소리와 바다새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낯선듯 익숙한 바다내음도 함께였다. 묘한 감회였다. 채운항. 운국의 항구도시. 언젠가 이 땅을 밟고 수월평원으로 떠났었다. 많이 변했지만, 또 그대로인 것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눈앞에 떡하니 서 있는 샛바람 여관 같은 것.


  "오빠, 일단 일어나봐."

  "아, 왜요, 존나 힘든데..."

  "저기 앞에 여관 있잖아. 저기 가서 쉬십시다. 응?"

  "방 존나 좋은 걸로 해줘요."

  "응, 방값 내가 낼 테니까."


  선요는 천명을 일으켰다. 천명의 호흡은 좀 진정된 듯 했지만 기본적인 것이 많이 소모된듯 했다. 그게 내공인지, 체력인지,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만 지친 기색이 역력한 것은 확실했기에 선요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천명은 투덜거릴 힘도 없는지 얌전히 미적거리는 걸음으로 걸었다. 그러는 동안 점차 용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천명이 방에 드러누워 쉬는 동안 선요는 제 정보상을 만나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좀 일렀지만 그녀라면 아마 깨어있을 게 분명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귀걸이 또한 빌렸다. 귀걸이를 부탁하자 천명은 느린 손길로 노란 장신구를 건네주며 이번에는 꼭 끼라고 한 마디를 했다. 그 귀걸이는 착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요는 그것을 끼지 않아 호되게 당했었던 언젠가의 일을 떠올리고 아예 보는 앞에서 귀걸이를 착용했다. 귀를 뚫지 않아도 되는 장신구여서 다행이었다.


  샛바람 여관을 나오자 공기가 한꺼번에 휘몰아쳤다. 저도 모르게 바람을 삼키자 목이 따가웠다. 황급히 입을 닫은 선요는 방향을 잡기 위해 고개를 틀었다. 진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니 자신의 정보꾼은 선착장에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고기잡이를 나갔던 어선이나 무역선들이 입항하기 시작하는 용의 시간.

  선요는 눈치껏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세 번째로 살핀 천막에서 지루한 얼굴로 무역선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묘영.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세월이 묻은 얼굴이 선요 쪽으로 홱 돌았다. 저를 부른 자를 확인한 묘영의 얼굴에 곧 놀란 기색이 번졌다. 선요는 포권하고 가만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묘영은 눈썹을 보란듯이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언제 왔느냐. 기별도 없이."

  "서신을 받고 오늘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새벽에? 서 거상의 배는 모레 저녁에나 들어오니 그걸 타고 올 수는 없었을 텐데 어떻게?"

  "빨리 올 수 있는 방법이 있었거든요. 비밀이지만요."


  묘영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곧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선요를 향해 손짓해 쌓인 짐 뒤쪽으로 이끌었다. 선요는 조심히 그녀를 따라가, 그녀가 빠르게 쏟아내기 시작한 말에 귀를 기울였다. 추합하자면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찾는 무리는 새벽에 채운항에 들어왔으며, 주점거리 쪽, 흑룡교 채운항 지부, 선착장에서 목격된 바 있고 출항자 목록에는 아직 이름이 없음. 오늘 출항 예정인 배는 하나. 샛바람 여관에선 머물지 않음. 선요가 머릿속에 그 정보들을 기록하는 중에 그녀는 곰방대를 툭툭 털며 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행방이 묘연해. 나도 더 알아볼 테지만, 이제 너도 알아봐야 할 차례야. 발품 팔어. 소매치기 조심하고."

  "가진 것도 없어요. 그럼 돌아다니려면 시간 없으니까 저는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또 뵈어요."

  "맞다. 화선요."


  몸을 돌리던 선요는 우뚝 멈춰섰다. 묘영은 흐린 눈으로 선요를 보다가 말을 뱉었다.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선요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묘영이 성냥을 꺼내 곰방대 안에 불씨를 틔워넣었다. 뿌연 연기가 유령처럼 치솟았다. 지천명에 가까운 얼굴이 다시 선명해질 때 비로소 말이 이어졌다.


  "혼자 집에 돌아가서 살 생각이냐?"

  "집이요?"

  "운국 집 말이야. 서 영감 집에서 계속 살 생각은 아니잖아."


  선요는 잠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 있다가 작게 웃었다. 고개가 찬찬히 흔들린 것은 다음이었다.


  "열두살부터 그곳은 제 집이 아니었어요, 묘영. 하준 나리 댁은 더더욱 아니고요. 지금도 나와서 살고 있는걸요."


  그리고 무사히 돌아가게 된다면 또 다른 곳이 집이 되리라. 그 말은 삼킨 선요가 묘영을 바라보았다. 묘영은 알겠다는 얼굴로 곰방대를 깊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저 들숨 속에서 그녀가 살아오는 동안 가시처럼 뻗친 회한이 담배연기와 엉켜 사라지고 있을 터였다. 그녀가 담배를 피우게 된 이유도 그 회한들이 아파서임에 분명했다.


  선요는 그녀의 회한처럼 뾰족한 것들이 자신 속에도 많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아파서 이제껏 울었고, 도망쳤으니까. 도망친다는 건 그 통증이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도망쳐도 살아 있는 한 그 통증은 영원히 계속 될 것이었다. 아비를 죽이고, 여동생을 죽게 하고, 어미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리고 이제 혈육마저 죽일 태초의 죄인. 그 통증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그런 인간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죄책감조차 혼자 안고 살아가는 인간. 그러니 어쩌면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숨을 쉬기 위해 통증을 만들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통증을 잊는 방법은 죽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양자택일이었다. 통증을 잊고 죽느냐, 통증을 품고 사느냐. 선요는 후자를 택했다.


  그치만 나중에, 너무 아프면 담배라도 피워볼까. 조금 덜 아파질 것 같은데. 아마 한 모금 채 빨아들이기도 전에 풍부한 기침소리로 집을 가득 메워버릴 테지만. 선요는 묘영의 곰방대, 그녀의 주름진 손가락, 그리고 그녀의 눈을 차례대로 바라보며 시시한 생각을 하곤, 다시 포권을 하고 떠났다. 묘영은 침묵으로 그를 보냈다.





  샛바람 여관으로 조심히 돌아오자 천명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언제 침대에 드러누웠냐는듯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왔습니까? 파충류 같은 동공을 희번뜩 빛내며 천명이 선요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말을 걸었다. 그래서, 얻은 건? ...다녀왔습니다. 선요는 뒤늦은 인사를 하곤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형의 행방이 지금 묘연하대요. 주점거리 쪽, 흑룡교 채운항 지부, 선착장 쪽에서 목격됐다지만. 선착장은 내가 좀 둘러보고 왔는데 수상해뵈는 사람은 안 보이더라고요. 날을 품은 것 같은 사람도. 형도."

  "혹시 모르지. 근데, 흑룡교?"

  "왜요. 또 싸우러 가게요?"

  "아니, 그건 아니고."


  천명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흐으응, 하고 목을 길게 울렸지만 더 말을 꺼내진 않았다. 선요는 찜찜하단 얼굴을 했다가 제가 하고 있는 귀걸이를 손으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흑룡교 지부 쪽에 같이 가줄래요? 알아봐야 하는데 거긴 혼자 가기 꺼림칙해."

  "흐음."


  흑룡교 지부 쪽엔 나 혼자 갈게. 그 편이 더 나을 거 같은데. 천명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말했다. 선요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언젠가의 대화를 떠올리고 그것도 합리적인 방법이라 생각했다. 찾는 이의 인상착의를 알려준 다음, 이런 사람을 봤냐고 물어보라는 말과 함께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동의가 선요의 입에서 나오자 천명은 발을 뻗어 바닥으로 내려서며 말했다.


  "귀걸이는 계속 끼고 있어요."

  "응. 무슨 일 있으면 부를게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천명이 갑자기 사라졌다. 몇 번을 보기도 했고, 심지어는 저런 식으로 이동도 해봤는데 여전히 눈앞에서 사라지면 참 신기하기만 했다. 선요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구석에 놓아두었던 검을 집어들었다. 천명이 흑룡교 쪽으로 갔으니, 남은 건 주점가 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요는 허탕을 쳤다. 주점거리에서 만난 눈이 큰 기생은 그런 사람을 본 적 있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안전히 숨을 수 있는 장소 혹은 채운항을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해로를 찾았다고 증언함과 동시에 선착장의 어떤 관리를 추천해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기생의 안내에 따라 선착장의 관리를 찾아가자 그런 사람을 보긴 하였으나, 원하는 정보를 알려주기 전에 노예를 구출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했다. 결국 원점이 된 것이다. 유선오는 신분이 낮은 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을 그리 달갑잖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생애 끝까지 오만할 인간. 굳이 대사막까지 가서 쌍세의 힘을 빌리려는 것도 그런 모난 성격이 한몫 했을 터였다. 그러나 어쨌든 그런 남자이기에 추격하기가 훨씬 힘이 든다. 선요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자신을 발견하고 짧은 한숨을 쉬었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멈춰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쩌면 천명이 흑룡교 쪽에서 뭔가를 알아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저녁 무렵에 다시 만난 천명은 옷이 선요가 기억하는 차림새가 아니었다. 옷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으니 선요는 그가 혼자가 되자 아마 또 대륙을 건넜으리라 생각했다. 흑백의 단정하지만 나름 위엄 있는 수련복을 갖춰입은 천명은 어쩐지 후련해진 얼굴로 명쾌하게 대답했다.


  "없어."


  아무리 살펴봐도 대화를 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은 지라, 몇 번 물어보니 한바탕 엎어놓고 온 모양이었다. 천명의 말을 빌리자면 '일 똑바로 하나 감찰했다.' 라고 했다. 그래도 잘 물어보고 왔다고. 선요는 신음성을 흘렸다가 고민에 잠겼다. 고민에 잠긴 사내의 입에서 정리하듯 이야기가 툭툭 떨어졌다. 내 쪽에도 아무 것도 없었어. 온갖 추측만이 난무하는 이야기들이 계속 됐다. 그렇다면 차라리 꾀어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까지 했을 때, 천명이 말허리를 잘랐다.


  "근데 서뇨씨."

  "네?"

  "나 배고픈데."

  "......"


  결국 천명이 먹을 뭔가를 시켜주고 나서 선요는 바깥으로 나왔다. 자신으로선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것이 없었기도 했다. 입에 뭘 넣어봤자 넘어가지도 않을 듯 하고. 여관 앞의 작은 수로를 따라 걸으며 선요는 한숨을 쉬었다. 수로 안의 검은 바다가 아가리를 쫙 벌리고 있었다. 잘못 헛딛으면 떨어지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선요는 시야를 멀리 던졌다. 흑룡교 채운항 지부 쪽은 낮에 천명이 횡포를 부렸던 것치곤 아주 고요했다. 형은 대체 저기 왜 나타났던걸까. 심중을 알 수 없는 형제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그는 당쟁에서 쓸모가 없어진 패다. 운국 정세는 불안정하다. 태후의 수렴청정과 부패한 대신들. 붓보다 칼이, 칼보다 돈이 강한 와중에 권력만이 그들의 주관심사다.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졸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중요하다. 패를 버리는 행위에 따라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고 탄탄해질 수도 있다. 정치라는 장기판 위에서는 패를 언제든 버릴 수 있다지만 유선오는 정쟁에서 허투루 버릴 패는 아니었다. 누군가의 사주로 사람을 죽게 하던 남자. 그가 입을 여는 순간 판이 뒤집힌다.


  그러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 곧 붙잡힐 사람이다. 벌써 잡혀갔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묘영이 벌써 알려줬을 것이다. 그러나 이르든 늦든 관료들의 눈도 그를 잡기 위해 따라다니고 있고, 피를 나눈 동생 또한 그의 뒤를 쫓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취를 잘 감출 줄 안다니 과연 그림자를 밟을 줄 아는 이라는 감상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음을 떼던 중 선요는 흑룡교 채운항 지부 근처에 서 있는 한 관군을 보았다. 사내는 창을 들고 서서는 어떤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창과 서적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러다 문득 선요는 천명이 저런 인간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 미쳐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수로 위에 놓인 다리를 지나는 동안 인기척 하나 내지 않았으나, 관군은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있었는지 선요 쪽을 힐끔 보고 책을 다시 품안에 갈무리해 넣었다. 서로를 인식한 다음에는 인사였다.


  "거 누구쇼?"

  "말씀 좀 여쭤볼 것이 있어서 왔는데요."


  약간 먼 석등 불빛에 사내 얼굴이 파리했다. 사내는 심중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선 고개를 갸웃했다.


  "뭔 말씀인데."

  "남자를 하나 찾고 있는데요. 보신 적 있을까 해서요. 저랑 같은 상아색 머리에 노란 눈을 가졌고요, 얼굴에는 세로로 흉터가 눈을 가로지르며 나 있어요. 피부는 조금 까무잡잡하고요, 저랑 약간 닮았는데 저보다 더 사내다워요. ...호랑이를 닮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선요는 그가 제 얼굴을 살피기 쉽게 빛을 조금 더 받는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사내는 그 설명만 듣고도 뭔가를 떠올렸는지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말한 인상의 비슷한 꼴을... 먼 발치서 보았는데 말이요. 그, 복면을 쓴 어떤 남자의 일행인 거 같더군."

  "복면요?"

  "더 듣고 싶으시면."


  사내가 퉁퉁한 손을 내밀고 씩 웃었다. 선요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 은전 몇 푼을 더 손에 얹어주며 말했다. 아는 대로 더 말해드리면 더 드리겠습니다. 사내는 그것이 마음에 든듯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얼굴에 이만한 두건을 두르고... 묵을 곳을 찾는 것 같던데요. 복면사내가 그걸 물었소. 샛바람 여관을 추천해주니 좀 사람 없이 조용히 머물 수 있는 곳을 찾길래 이 뒷골목에 샛바람 여관만큼은 아니지만 거, 빈 집도 있고, 묵을 곳이 좀 있으니 그리 가는 건 어떻겠냐 말해줬수다."

  "뒷골목...? 복면 쓴 남자는 어떻게 생겼었나요?"

  "외원 쪽이랑 가까운데 뭐 이래저래해서 사람이 별로 없습디다. 그 뭐, 복면을 써서 제대로는 모르겠지만 갈색머리였수다. 앞머리가 눈까지 다 덮어서 모르겠더만... 어, 녹색눈이었구."


  빈 집. 선요는 아마 이 사내와 대화한 것이 선오의 수행원일 것이라 생각했다. 고맙다고 대답한 뒤 가려던 찰나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선요는 까닥여지는 굵은 손가락을 보다가 그 위에 은전을 얹어주었다. 탐욕스런 사내가 그것을 호주머니에 찔러넣는 걸 보고 나서 선요는 몸을 돌렸다. 이제야 좀 숨이 트이는 것도 같았다.


  조선소가 근처에 있는지 간간히 작업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선요는 바로 뒷골목으로 들어갈까 하다 검을 들고 나오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고 다시 여관으로 돌아갔다. 천명은 식사를 다 마친듯 했다. 뒷골목 쪽에 있을 듯 하다던데.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자 천명이 입맛을 쩝 다셨다.


  "뒷골목 정확히 어디?"

  "거기까진 모르겠고요."

  "다 뒤져야겠군."


  듣는 것만으로 지치지만 맞는 말이었다. 선요는 검을 챙겨 들고 천명과 함께 뒷골목으로 향했다.

  건물이 살짝 높은 편에, 근처엔 조선소가 있다. 다박다박 붙은 것이 썩 입지가 좋아보이진 않았다. 이런 곳에 묵을지도 모른다는 게 의외였지만, 실끝 같은 희망을 그냥 내버릴 순 없었다. 그러나 조선소의 작업소리가 들려오는 것말고는 딱히 큰 소리가 없었다. 사람 소리보단 오히려 들쥐의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기척도 없는 검은 골목들.

  그러다 실마리를 겨우 잡은 건, 벽돌이 삐쳐나온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모퉁이에서 만난 생선 냄새 풍기는 여인으로부터 의외의 정보를 얻은 것이다. 여인은 그런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을 찾는 다른 사람과 접촉했었다고 했다. 선요는 그 다른 사람을 어디서 보았느냐 물었다.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대답했다.

  그, 저쪽 제일 외원 쪽의 골목에서 보긴 봤는데 뭐 하는 작잔진 모르고. 옷 좀 괜찮은 걸로 차려 입었던데 거짓말로라도 돈 받아낼 걸 그랬수. 낄낄거리며 웃는 여자에게 선요는 돈을 쥐여주고 그의 인상착의를 물었다. 여인은 좋아라 하며 하얀 머리에 갈색 눈인데, 왼쪽 눈에 자상이 있었다 대답한 뒤 제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닫힌 문이 잠기는 소릴 듣던 선요가 가만히 속삭였다.


  "추측컨대 아마 형 쫓는 사람들 중 하나일 거 같아. 형의 사람이라면 물을 필요도 없지. 다른 곳으로 유인하려는 게 아니면 일부러 그런 이야길 뿌릴 필요도 없고."

  "거 서뇨씨 형님 인기 많으시네."

  "많아서 좋을 게 하나 없는 인기지만. 그나저나 큰일이야. 그러면 생각해야 하는 수가 더 많아지는데."


  둘은 일단 더 뒤져보자는 쪽으로 합의를 보고 움직이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밤새 뒤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뒷골목은 의외로 넓은 편이었고, 간간히 인가가 있었기 때문에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몇 시진이나 지났을까, 삼층짜리 건물을 뒤져보고 내려온 선요가 하품을 했다. 천명은 벽에 등을 기대고 손가락을 까닥이고 있었다. 어둠이 그 몸 위로 스며들어 천명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엔 조금 오래 걸렸다. 그가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그를 불러봐야 알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허탕?"

  "뭐, 그렇네요. 더 뒤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점점 몸이 무거워져ㅅ..."

  "그럼, 돌아가죠? 인간은 자야하지 않아?"

  "그렇지."


  마음 같아서는 더 돌아보고 싶었지만, 선요는 눈앞이 슬슬 침침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좀전에는 하품도 한 참이니 더 시간을 끌다간 오히려 내일을 망칠지도 몰랐다. 선요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 박성준의 '회복기의 노래'를 변용. 원문은 '나는 숨을 쉬기 위해서 통증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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