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살다보면 그렇게 눈앞에서 놓치는 것들이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선요는 쪽잠으로 피곤을 조금 떨쳐내자마자 다시 찾아간 뒷골목에서 그 해묵은 격언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새벽의 푸른 빛이 드리운 뒷골목엔 간밤에 여기서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천명은 헤에. 하고 머리 뒤로 깍지를 꼈다. 벌써 서뇨씨 형이 죽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럼 재미없는데. 천명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선요는 그 이야기를 수군대는 주민들 중 하나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이야기를 청했다. 사람이 몇 없어 이미 그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벌써 다 전해진 모양으로, 누구는 시신을 정말로 본 모양이었다. 떠벌리는 모양새가 꼭 그랬다.
선요가 가장 수다스레 떠드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부부로 보이는 여인 하나와 사내 하나였다. 선요가 조심스럽게 그 시신에 대해 묻자 그들은 질리지도 않는지 저들이 본 것을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꼭두새벽에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데, 이놈의 마누라가 뭘 놔두고 왔다고 해갖고 도로 돌아갔지. 근데 가는 길에 웬 사람 소리가 들리더군. 보아하니 칼잽이들인겨...... 막 없어졌다가 번쩍번쩍 나타나는데...... 우리는 안 죽을라고 얼른 숨어서 입을 틀어막았지.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살수들인 것 같았다. 선요는 그 죽은 자의 인상착의가 어땠느냐고 물었다. 그 말에 남자가 목소리를 되려 낮추며 속닥거렸다. 흰 머리였소. 같이 싸웠던 사람은요? 갈색이었나, 까만색이었나. 어두워서 잘 안 보였소. 나야 소리 안 지를라고 노력하느라구...... 시신은 흑룡교도님들이 처리해주셔서 망정이지, 아이고. 흑룡교도들이 시신을 처리한다는 말이 어쩐지 꺼림칙했다. 그러나 선요에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 뒤에는요?"
"몰러, 갑자기 휙 하구 사라지더만. 아, 골목 바깥으로 나가는 건 봤소. 일행이 있더구만."
그 뒤에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외원 아니면, 채운항 내부. 사실 어디로 이동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역시 추측을 해야한다. 금방 살인을 저지른 자와 함께라도 채운항 내부를 버젓이 걸어다닐만한 유선오기에 선택지를 좁히기가 어렵다. 어떤 의미에선 행동범주가 좁으나, 어떤 의미로는 넓은 사람. 종잡을 수가 없다.
선요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천명에게 돌아왔다. 천명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지루하다는 듯 눈을 굴리고 있었다. 자신의 정보가 조금이라도 그의 지루함을 덜까 싶어, 선요는 제법 빠르게 말을 꺼냈다.
"형은 어제 분명히 이 근처에 있었고, 오늘 새벽에 그쪽으로 간 것 같아. 젠장... 조금만 더 찾아볼걸."
"오, 서뇨씨 욕했당."
"나도 욕 할 줄 알아요. 아니, 그보다 오빠, 괜찮으면 선착장 쪽 둘러봐줄래요? 부탁해. 넓으니까 오빠가 가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 난 외원 쪽으로 갈게. 아직 사건이 발생한지 두 시진도 안 지났어. 어쩌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외원 쪽도 좁은 건 아닐 테지만. 천명은 아무 반응 없이 피식 하고 웃었지만 곧 긍정이라도 한듯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선요 또한 골목 바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외원으로 향하는 오르막 계단을 몇 걸음씩 뛰어올라가던 도중에는 풀냄새가 났다. 이윽고 풀냄새가 아주 쏟아졌다. 시야가 갑자기 탁 트이자 어지러웠다. 시야가 넓어지면, 사람을 찾는 건 쉬워진다.
홀로 풀을 헤치며 걷는다. 옷 밑단이나 신발에 풀물이 들기 시작하는 건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곧 풀물보다 더 죄가 깊은 물로 물들 텐데. 잠시 가슴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종내 빠지지 않는 그 물 때문에 어깨를 떨 테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는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흔적을 쫓기로 한다. 두려움에 떠는 건, 나중에도 할 수 있다. 물러터져선 안 된다. 떠나기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하자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절로 웃음이 피었다.
선요는 이윽고 풀이 여러 번 밟힌 자리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자는 정리된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 길 위를 따르면 큰 흔적이 남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풀숲이 아주 안전한 것만은 아니다. 바로 지금처럼. 이 흔적을 만든 자는 강의 오른쪽, 다리를 건넌듯 했다. 흔적을 따라 걸으며 선요는 궤적이 큰 길만 걸어오다 이제 형체가 남지 않는 길만 찾아 걸어야 하는 혈육을 생각했다. 우습기보단, 안쓰럽다. 다른 정치적인 연유 같은 건 아무 것도 상관없었다. 선요는 많이 가졌던 자가 한꺼번에 잃은 기분에 대해서 함부로 비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챙. 어디선가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주워섬긴 몸에 소름이 돋았다. 선요는 등 뒤에 맨 칼을 끌러내리며 풀숲 사이로 몸을 낮췄다. 얼마 가지 않아 다리 너머, 눈을 닮은 듯한 조각으로 장식된 문 앞에 다섯 명의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짙은 회색의 옷을 차려 입고 있었고, 둘은 검은 옷을, 나머지 둘은 흑룡교도복을 입고 있었다. 그 중 회색 옷을 입은 남자를 보는 순간, 선요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뒷모습 뿐이었고, 심지어 그는 갓을 쓰고 있었지만, 선요는 알아챌 수 있었다. 형.
거리가 멀었지만, 선요는 그가 주먹을 쥐고 있다는 걸 알았다.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닌 듯했다. 검은 옷을 입은 두 명의 살수는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흑룡교도 두 명은 문 쪽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뭐라 말하는 듯 손을 움직이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수행인이 둘 뿐이다. 자신이 알기론 다섯이었고, 하나는 버려진 숲을 통과하는 와중에 죽었다. 그럼 남은 것은 넷. 그 사이에 사람이 줄었나? 어쩌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선요는 자신이 그런 수많은 가능성이 포진해 있는 이 상황에 다가가는 일은 섣부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자리를 떠 천명을 찾느냐?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겨우 실마리를 잡았는데 이렇게 놓칠 순 없었다.
선요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다가 제 검을 슬그머니 뉘였다. 좋은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이 과연 가능할런지는 모르겠지만 시도 안 하는 것보단 나았다. 어디가 가장 덜 불편할 것인가. 급소는 아닐 것, 검을 잡을 때 불편하지 않을 것, 마찬가지로 검을 휘두를 때 그리 불편한 곳이 아닐 것. 선택은 잠깐이었다.
곧 소매를 걷은 손목 안쪽에 작은 자상이 생겼다. 선요는 급습하는 따끔함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검을 떼기도 전에 선요는 옆의 공간이 이지러지는 것을 보았다.
"뭐야. 뭔 일입니까?"
진짜 될 줄은 몰랐는데. 선요는 얼떨떨한 얼굴로 옆을 보았다. 천명이 옆에 와 있었다. 천명은 오고나서 보니 아무 일도 일어나 있지 않다는 것에 의아한 듯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선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선요가 급히 속삭였다.
"쉿, 소리 낮춰요. 몸도 낮추고요."
천명은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선요는 몸을 웅크려 조금 전에 상처를 냈던 자리를 덮고 꾹 눌렀다. 옷 위에 붉은 꽃물이 아롱아롱 번졌다. 그제야 천명은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감탄을 터뜨렸다.
"와, 지금 이거 나 부르려고 자해한 거? 방법 참 신박하네. 이렇게 부를 줄은 몰랐는데. 아, 칭찬이에요. 기뻐해."
"칭찬 같지 않은 칭찬 고맙구요... 저쪽 봐요. 회색 옷. 보여요? 형이에요."
헤에. 천명이 작은 소리를 냈다. 선요는 태평한 천명에게 조곤조곤 자신이 파악한 상황 설명을 했다. 아마 흑룡교와 뭔가를 협상하려고 하는듯 하는데 좀체 쉽지 않아 보인다고. 천명은 입맛을 다시는 시늉을 했다가 말했다.
"아마 본당에 숨으려는 모양인데."
"역시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본당은 일단 힘이 있고, 크고 넓은 편이고. 사람들이 다가가기 힘들 테니까. 채운항 지부에서도 묵으려고 했었을까?"
"뭐, 그건 알 바 아니지만, 이번에도 실패할 거야. 장담하지."
"왜요?"
"서뇨씨는 몰라도 되는 일. 일급비밀이라고나 할까."
천명은 의뭉스럽게 키득거렸다. 선요나 선요의 형이나 흑룡교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 재미있어서는 아니었다.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웃긴다는 감상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천명이 웃음을 흘린 건 회색 옷을 입은 자의 뒤에 어른거리는 어떤 신기루 같은 것 때문이었다.
"넷이네."
"넷?"
"살수가 넷이야. 회색 옷 뒤에 둘이 은신해 있어."
"-급습하려고 했는데."
한참 상황을 살피는 도중, 전황이 바뀌었다. 살수 일행과 실랑이를 벌이던 흑룡교도 두 명이 결국 문 안 쪽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천명은 협상이 결렬된 모양인데, 하고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그러다 선요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아까부터 느끼고 있던 기시감에 대해 이야기 했다.
"다섯이어야 하는데."
"뭐가?"
"형의 수행인이요."
"줄어든 거 아냐?"
"...모르겠어."
다섯이든 넷이든 아무렴 어때. 어차피 저거 다 내 거잖아요. 그쵸. 천명은 수가 적다는 것에 살짝 유감을 표했지만 곧 쾌활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다섯을 약속했는데 수가 적네요. 선요가 미안하다는 말로 그 중얼거림을 받아쳤다. 괜찮아요. 재미만 있으면 돼. 천명이 노래부르듯 흥얼거렸다. 그 순간 삿갓을 쓴 사내가 몸을 돌렸다. 수행인 둘은 그보다 뒤늦게 그를 따른다. 어떡할까. 천명과 선요의 시선이 부딪쳤다. 먼저 가. 선요가 속삭였다. 분부대로. 천명은 씩 웃었고,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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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가장 짧은 시간이 되었다. 암살자들이 모습을 감추기 가장 좋은 시간 중 한 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습을 더 감추지 않았던 수행원 중 하나는 제 불찰에 대해 벌이라도 받는듯 금세 강 쪽으로 나가 떨어졌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공기가 멈춘다.
급작스러운 습격과 낯선 자의 등장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동요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이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 천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두 팔을 쫙 펼치곤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갓을 쓴 사내가 호령했다.
"웬 놈이냐! 어제 그 자와 한 패인가? 주 대감이 보냈나?"
"주 대감? 아니? 그보다 이 몸께선 인간 밑에서 일 안 해."
천명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갓 아래에 숨겨진 사내의 얼굴을 슬그머니 살폈다. 노란 눈이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분노와 살려는 의지 같은 것들이 한데 뒤섞여 끈끈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복면 쓴 사내들은 어떤가. 그들은 셋으로 불어나 있었다. 자신이 확인한 건 넷이었는데. 하나는 간이라도 보려는 모양이야. 천명은 눈만 남기고 전부 꽁꽁 싸맨 살수들이 저를 향해 날을 세우고 대치하고 있음에도 여유만만하게 머리를 쓸어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움직임이 없는 살수들의 눈에서는 기묘한 오만 같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길 수 있다, 하나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인가? 천명은 색이 다른 눈들을 보다가 저들이 품고 있는 꿈을 부수는 게 얼마나 재미있을지를 생각해보았다.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 앞에서 갖고 있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그 순간만 볼 수 있는 멸망의 이지러짐. 뭐, 재미있겠네. 나름대로.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용은 건들거리며 아까 걷어차 나가떨어진 사내가 몸을 꿈틀거리며 일으키고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천명이 걷어차버린 탓에 귀와 볼, 그리고 복면 일부가 찢어진 채 너덜거리고 있었다. 피냄새. 천명은 부러 박수를 크게 쳤다. 칭찬해줄게! 안 죽었네.
유 선오가 고함을 쳤다. 저 자를 죽여!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살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두 자루의 소태도들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 제 목을 노리는 일촉즉발의 상황에도 천명은 웃기만 하다가 공간을 찢어 이동했다. 여태 엎드려 있는 피투성이 사내의 위였다. 사내의 몸을 발로 걷어차올린 천명은 다시 발바닥으로 그 몸을 밀어 차냈다. 짧은 비명이 울리며 정면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투명하던 공간이 부자연스럽게 다른 풍경들과 엉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걸렸지? 천명은 바로 공간을 찢고 거리를 좁힌 뒤 한 쪽 허공을 움켜쥐었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살수 하나의 은신이 풀렸다.
"내가 원래 미개한 것에 손을 안 대는 주의인데..."
영광으로 아십쇼. 천명이 잡은 살수의 목을 꽉 죄는 순간 뒤에서 다른 날이 하나 치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걸 알아챈 천명은 뒤를 향해 발을 밑에서부터 쳐올렸다. 그 반격은 살수의 손목에 정확히 맞아들어가 궤적을 바꾸었다. 소태도를 놓지 않은 게 용했다. 몸이 휘청인 살수를 향해 천명이 가볍게 발짓했다. 아니, 가볍다는 건 오롯이 천명의 기준에서였다. 이윽고 땅을 향해 묵직하게 내리꽂힌 살수의 몸 위에 천명의 발이 콱콱 떨어졌다. 여전히 오른손에 살수의 목을 쥔 채였다. 새끼 맹수처럼 버둥거리던 살수는 천명을 발로 걷어찼지만 천명은 그럴 때마다 그의 목을 더 꽉 조였다. 호흡을 갈구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살고 싶어? 천명이 뱀처럼 속삭였다. 그러나 살수는 시뻘개진 눈을 홉뜬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천명은 손에 힘을 살짝 풀었다. 생명수라도 찾은듯 그 간발의 틈새에 살수가 허겁지겁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천명이 다시 힘을 주었다. 웃음소리가 들린듯 했다.
선오는 살수 셋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고 있는 남자를 보며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걸음은 절로 조금씩 뒤를 세고 있다. 자신의 뒤에 있던 다른 살수 한 명 또한 갑자기 나타난 사내의 무공이 범상찮다는 걸 깨달아, 선오의 호위를 포기하고 움직이기로 결심한듯 어느새 등 뒤가 휑했다.
상황이 너무나도 막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돌아가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버려진 숲 아래쪽 길을 따라 겨우 성도 정문까지 갔더니 자신이 도착하기 바로 얼마 전에 봉인이 걸려버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고, 해로를 이용하려 했더니 하류층 인간들과 함께 한 배에 탄 동지가 되라고 하질 않나. 어쩌면 눈 딱 감고 노예를 풀어주는 데에 동참했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자존심, 그 망할 자존심이 끝까지 반대했다. 어떻게든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자신을 쓰다 버린 주 대감, 그 주 대감이 꺼림칙하게 여겨 학을 떼는 그 흑룡교라면 자신을 어쩌면 숨겨줄지도 모른다. 흑룡에게 조공을 바치면 되지 않을까. 돈이라면 조달할 수 있다. 쓸만한 보석을 아직 갖고 있었다. 괜찮은 해로를 알아볼 때까지 달라면 얼마든지 다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그들은 거절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치적 정보를 전부 내준다는 말에도. 채운항에서도, 이곳 본당에서도.
살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서 가문을 유지해야 했다. 보다 청정한 피로, 보다 순결한 피만으로. 아니, 그보다는 더 근원적인 욕망.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았다. 가문이나 정치 같은 나부랭이 것들은 그 다음이다.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는 아주 원초적인 욕망. 그것이 유선오를 좀먹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그 살고자 하는 욕망의 불길마저 쉽게 꺼뜨려버리고 있었다. 사내의 일격 하나하나는 강력했고, 수를 다 읽고 있다는 듯 여유롭게 움직인다. 심지어 무슨 사술인지 허공에서 불쑥불쑥 나타나기까지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아닐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미친다. 이대로 어디로 갈까, 궁처로 들어갈 수는 없다. 궁에는 이제 아무도 함부로 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애초에 궁으로 간다는 건 사자 아가리에 들어가는 셈이다. 궁의 관리들을 피해 여기까지 온 것이니까. 채운항, 다시 채운항으로 돌아가자. 거기 가서 숨어 있다가, 어떻게든 다음 수를 찾자. 일단 살기만 한다면─
그러나 선오는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날카로운 검날이 제 목전에서 시뻘겋게 빛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낮의 햇볕이 날을 달구었는지 어떤 열이 혀를 낼름거리며 제 목을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검인가. 바로 뒤에 답이 있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시선을 던진 순간에, 선오는 아주 오래 찾았던 얼굴과 마주했다.
▒
목에서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선오는 자신이 몸을 젖히지 않았다면 이것보다 훨씬 큰 부상을 입었으리라 짐작했다. 딱 한 번 벤 뒤 다시 검을 고쳐잡고 금세라도 발도하겠다는 듯 선 눈앞의 소년, 아니, 이젠 소년이 아닌 남자를 응시한 선오는 제 소태도를 부여잡았다.
"유 선요."
"오랜만입니다. 선오 형님."
저 사내에게 얼마나 많은 살수들을 보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목숨을 부여한 남자. 아비를 죽인 자이자, 어찌됐건 피를 나눈 이복 형제. 풍제국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고, 그 때문에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추적을 계속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제 눈앞에 있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이겠지. 목을 순순히 내주러 왔을 리는 없을 테니까. 선오는 소태도를 쥐지 않은 손으로 목의 상처를 꽉 눌렀다가 웃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 목숨의 영위보다 소중한 제 자존심, 그 빌어먹을 자존심을 치켜세울 때가 왔다. 오래토록 원해왔던 한 인간의 목을 얻을 수 있을 때가 온 것이다. 저 목만 벨 수 있다면 하루 뒤에 죽어도 좋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요는 자세를 고치지 않은 채 눈만 굴려 천명 쪽을 보았다. 천명은 여전히 숨이 붙은 살수 하나를 가지고 놀다 질렸는지, 다시 자세를 고쳐잡은 다른 살수와 합을 맞대고 있었다. 선요가 눈을 굴리는 것을 본 선오가 질문을 던졌다.
"저 자는, 네 놈과 한 패인가?"
"예. 함께 왔습니다. 그는 제 친우입니다."
친우? 사내의 날카로운 대답이 돌아왔다. 친우라고? 친우라니 너에겐 정말 배부른 소리구나. 선요는 그 도발에도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검을 당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 형제가 고개를 흔들곤 피 끓는 소리로 웃었다.
"됐다,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느냐.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너다. 네 숨을 앗아가는 것. 나는 복수를 위해 너무 오래 기다렸거든, 선요야. 그러니 어서 싸우자."
선오가 전투세를 취했다. 앞으로 몇 번의 합을 붙을 수 있을까. 선요는 선오가 자신을 향해 달겨드는 것에 검을 세로로 세웠다. 한 합. 두 합. 선오는 두 번 소태도를 휘둘렀다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뒤. 선요는 본능적으로 발을 제쳐 거리를 벌렸다. 순간적으로 따끔한 감각이 옆목을 달렸다. 거리가 벌려지자, 모습을 드러낸 선오가 아쉽다는 듯 웃는 게 보였다. 등 뒤에서 날을 찔러넣으려 했구나. 수를 대강은 읽었기에 망정이지. 선요는 입술을 깨물었다. 선오가 날에 묻은 피를 떨쳐내며 고함을 질렀다.
"도망치지 마라, 아버지를 죽인 죄를 네 목숨으로 갚아!"
선요는 목숨으로 갚으라는 그 말이 제 가슴에 와 박히는 것을 느끼고 웃었다. 선오에게, 아버지는 세계였다. 자신에게 어머니가 세계였던 것과 똑같이.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갖고 있던 세계의 잔존은 허상으로만 남아있다. 누구도 오롯이 가진 게 없었다.
선요는 아버지를 죽여 선오의 세계를 무너뜨렸다. 선오는 그에 대한 복수로 선요의 어머니를 죽여 선요의 세계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서로는 서로를 쫓고, 도망치고, 쫓았다.
이건 형제 간의 반목 그 이상의 일이었다. 어떤 세계를 사랑했던 자들이 만들어낸 운명의 수레바퀴.
"죄송해요, 형님."
쏟아지는 햇볕에 피가 눈물과 함께 녹는다. 한데 엉겨 말라붙기 시작하는 자국자국들이 옷 위에, 피부 위에 흔적을 새겨갔다. 선요는 얼굴을 일그러뜨려 웃었다. 절규 같은 웃음이었다.
"그건 목숨으로 갚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서 오래오래 아파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평생 사죄할 겁니다."
"분수를 모르고 살고 싶어한다는 말임엔 잘 알겠다."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이 맞아요. 하지만 살고 싶습니다. 형님도 마찬가지잖아요. 지금 이 순간 저희는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죄책감의 무게가 그 차이일 뿐. 그런데, 그게 우리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이유예요. 우리는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삽니다."
선오는 말이 없었다. 선요는 그게 긍정의 침묵임을 알았다. 짧은 침묵 후, 선오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는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살아.
"그러니까 누가 살 지를 결정하자."
선오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낮의 햇볕은 뜨거웠다. 빛을 실은 두 날이 서로의 목을 찢기 위해 덤벼들었다. 몇 합을 맞붙었는지 제대로 새기도 전에 피와 땀이 바닥에 고인다. 몇 번인가 목을 벨 겨를이 있었다. 그러나 둘은 번번히 그 때마다 실패하고 말았다. 실패의 흔적이 몸에 새겨진다. 어깨에, 목에, 팔다리에, 몸뚱아리에.
그렇게 피투성이 몸이 되어갈 때마다 걸음이나 움직임이 느려짐은 확실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먼저 멈추지는 않았다. 멈추는 순간 죽을 것이라는 걸 둘 모두 알고 있었다.
공기의 흐름을 읽으며 서로의 모습을 눈에서 떼지 않으려 노력한다. 살면서 시선이 이토록 오래 이어져 본 적이 있었던가? 서로는 서로의 삶의 끝에서 비로소 우애와 닮은 비정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고 서로가 받게 되는 것이 비정이기에, 이것은 명백한 비극이 된다.
검과 도가 제 이를 부수어 가던 중, 어느 새 앞으로 딱 한 수. 딱 한 수면 서로 끝이 날 것 같았다.
천명은 발치에 늘어져 꿈틀거리는 살수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툭툭 차며 멈춰 서 있는 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셋을 셌다. 둘이 서로에게 움직이기까지의 시간. 하나. 선요가 검을 꽉 쥔다. 둘. 선오 또한 무거운 몸을 낮추었다. 셋. 둘의 모습이 지면에서 아지랑이처럼 흩어진다.
챙, 하고 날이 부딪혔다. 딱 한 번이었다. 그러나 그 단 한 번만이, 짧은 시간에 그토록 혹사당한 것을 더 이기지 못한 무기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제 소태도의 날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선오가 고함을 질렀다. 차마 알아듣기 힘든 소리였다. 그리고 절규의 메아리 끄트머리에서, 선요가 검을 내질렀다.
피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검이 정확히 선오의 목을 찌른 것이었다. 선오는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 선요를 바라보았다. 선요는 피칠한 얼굴 그대로 선오를 마주했다. 시뻘건 피가 선오의 입에서 왈칵 쏟겼다. 안녕히 가세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심 어린 작별인사를 건네며, 선요가 검을 뽑았다.
어느 사이엔가 기운 해 앞으로 붉은 분수가 솟았다. 그 치솟은 피로 뒤덮인 선오의 몸이 쓰러져,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선요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위에 다시 검을 내리꽂았다. 선오가 웃는 것과 동시에, 몸의 떨림이 멈추었다. 그제야 선요는 손에서 검을 놓았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귀를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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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묻어 붉은 시야로 하늘을 올려다 보면 편편히 떨어져 내리던 햇살이 볼을 적시며 흘러 내렸다. 아마 눈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마 정말 그렇더라도 피 때문에 아무도 모를 게 분명했다. 그래서 선요는 눈꺼풀을 닫기로 했다. 시야를 물들이는 어둠을 더듬는 동안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에 순응하며 무릎을 풀썩 꿇은 선요는 눈을 감았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어깨에 죄가 무겁게 내려앉는 것만이 선명했다. 아비를 죽이고, 여동생과 어머니를 죽게 하고, 이제는 형까지 죽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가슴을 적시는 건, 살아남았고,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이었다. 이제 돌아갈 수 있다. 바람에 꽃내음 실려오는 곳으로.
"살아 있어?"
그러나 그 안도감에 오래 젖기도 전에, 천명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현실을 일깨웠다. 선요는 겨우 눈을 뜨고 그의 말을 속으로 따라 뇌까렸다. 살아 있어? 물론이다. 살아있어야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선요는 얼굴에 아주 희미한 미소를 피웠다. 고통과 더불어 여전히 처연함이 묻어 있는 얼굴이었다.
"...네."
눈앞의 사내는 씩 웃었다. 선요는 문득 시선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가, 웃는 천명에게 다시 시선을 겨우 고정하고 속삭였다.
"근데... 나, 의원에, 가야할 거, 같은데요. ...좀. 도와, 줘."
그런데 천명이 뭐라고 했는지가 들리지 않았다. 선요는 왜 그의 입은 움직이는데, 소리는 나지 않는가에 대해 생각하다 갑자기 이명이 들린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 다음은 간단했다. 기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해묵은 긴장이 풀려서, 꽤 오래 잠들어버릴 지도 몰랐다.
그러나 분명한 건, 잠들어 있다가 눈을 뜰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돌아가기로 약속했으니까. 나는 약속을 아주 잘 지키는 사람이거든. 선요는 의식의 끝에서 농담을 했다.
돌아갈 수 있다. 꽃과 봄이 있을 평원으로, 겨울의 마지막 서리를 밟으며, 어느 손끝에 맞닿으러. 이윽고 이어질 손끝은 꿈꾸던 이상향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확신할 순 없었다. 이듬해 봄이 되어도 발에는 질척한 진흙이 들러붙고 걸음을 뗄 때마다 몸이 몰래 가라앉으리라. 자신은 늘 몰래 울게 되겠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마음에는 후회가 없었다.
그러면 조금은 된 거 아닐까. 나중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시야가 온전히 닫히기 바로 직전, 문득 선요는 선오의 시신 위에 새 한 마리가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아, 그래. 흙이라도 한 줌 뿌려드릴 것을.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명 사이로, 겨울이 끝나는 소리가 들렸다.
겨울의 끝
thanks to soha
* 제후님의 자작 문장을 변용. 원문은 '이어진 손끝이 꿈꾸던 이상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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